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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리더십 - 정운천 회장

소통의 리더십

前)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정운천


먼저 본론에 앞서 수천년 전해져온 각설이타령이 무었을 뜻하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알지(知)자를 들고나 보니 시구(矢口)시구(矢口)들어간다. 얼(?)시구 절(節)시구 지화자 조을시구(知化者 鳥乙矢口). 많은 사람들이 각설이 타령을 추임새로 알고 있지만 여기에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知化者 鳥乙矢口” 변화를 아는 자는 조을을 아느니라. 여기에서 鳥는 봄철새 조 즉 제비를 뜻하고 乙은 가을 철새 기러기를 뜻한다. 봄철새 제비가 2만리 강남까지 갔다가 정확한 시간에 오고 가을철새 기러기가 수만리 시베리아까지 갔다가 정확한 시간에 오는데 그 때를 아느뇨? 지식(知識)의 으뜸은 무었이뇨? 그게 바로 때를 아는 것이니라. 선각자들이 이 깊은 뜻을 알리기 위해 각설이 타령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첫 번째 예로 이 충무공의 전승 비결이 바로 나아가 공격할 때, 역적으로 몰리면서 까지 때를 기다리는 것, 길목을 찾아 정확한 때를 만들어서 승리를 이끌어 낸 것이야 말로 때를 정확하게 아는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은 정확한 때를 얼마나 잘 알아서 행동하고 실천하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 지금 이 시대는 화합과 소통의 정치시대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치는 불신과 불통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화합과 소통이 되려면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 신뢰가 되려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배려와 양보가 있어야 서로 공감하고 신뢰의 싹이 틀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이 없이 서로 자기만 옳고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으니 소통이 잘될 수가 없다.

2008년5월부터 100일동안 대한민국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버린 광우병 파동이 일어났다. 서구에서는 이미 그 원인을 밝혀 광우병을 잠재우기 시작한 시기에 대한민국에서는 그를 확대 생산하여 허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광우병은 초식동물인 소에게 육식을 먹여서 생긴 병이다. 인간의 탐욕이 우주의 섭리를 깨버린 재앙이다. 따라서 소에게 동물성사료만 완전히 금지하고 초식만 먹이면 이 병은 생길이유가 없다. 1980년대 원인을 모르고 육골분 사료를 먹였을 때 수만 마리가 광우병이 걸렸다. 1992년 원인을 알고 동물성사료를 금지한 이후 현저하게 떨어져 일 년에 100마리 이하로 줄었고 사람광우병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도 30년 전에 일어났던 공포가 대한민국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고 갔으니 얼마나 참담한 일이겠는가? 불신의 바탕에는 오류지식이 완전지식을 뛰어넘어 온 세상을 덮을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10년 후에는 수십만 명이 광우병으로 재앙이 올 것이다. 라고 공포심을 주었는데 7년이 지난 오늘날 지구상에 인간광우병을 어디에서 찾아 볼 수가 있는가? 2008년 6월10일 시청 앞 광장 수십만 명의 촛불시위 절정을 이루었다. 광우병대책위에 자유토론에 참석하겠다고 통보했다. 답은 안전에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렇게 불통정부라고 외치던 시위대인데 주무장관이 직접 가겠다고 하니 거절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소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자유토론 직전에 시위대에 막혀 자유토론은 못했지만 국민들에게 온몸을 던져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쉬웠다.

1981년 고려대 농업경제과를 졸업했다. 공인감정사를 합격하여 취업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5.18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이후였다. 친구들이 감옥에 있고 세상이 어수선하였다. 그 어수선할 때 만난 분이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다. 그 분은 고대 설립자이고 내가 묘하게도 그 분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 분의 어록에 “인생이 가는 길 중에 최첨단의 길을 가던지 아니면 가장 낙후된 길을 가라.” “그 당시 어수선한 시국이라서 울림이 있었다. 결국 후자를 선택해서 가장 낙후된 땅 끝 해남을 선택했다. 1984년 고산 윤선도 종손에게 땅 6000평을 20년 임차하였다.
1978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남해시험장에서 시험재배 되기 시작된 키위농업에 뛰어들었다. 1987년에 불어 닥친 셀마태풍에 내가 살고 있던 비닐하우스 천막집도 6000평의 키위밭도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그 절망의 위기에서 소통이 잘 안되던 동네사람들과 소통의 기회가 되었고 그 분들이 주는 온정이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 되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1990년 노태우정부시절 농산 물수입개방으로 고비를 맞았다. 막 걸음마 단계에서 맞은 키위 수입개방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키위농업을 접을 생각을 하니 나를 믿고 따라온 300여 농가들이 눈에 밟혀서 진퇴양난이었다. 그 기로에서 만난 분이 이순신이었다. 30킬로 떨어진 명량대첩지에서 죽음의 길목에서 만난 사즉생(死卽生)정신이었다. 도저히 전력비교 로는 상상이 안 되는 승리 배 13척 가지고 133척을 무찌른 기적은 불퇴전의 용기와 리더십 지형지물을 이용한 명량의 협곡이었다.

키위수입개방의 대응은 이제 소비자를 놓고 한판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가진 것은 불과 600평 규모와 300여 농가 이제 막 시작단계에서 국민들은 국산키위가 생산되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생산해서 용산도매상인한테 팔아넘기는 것이 전부였다. 저장시설도 선별 포장시설도 상품화에 의한 판매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백화점에서 승부를 걸기위해서는 준비해야한다. 저장시설은 양파창고를 빌리기로 했다. 선별기는 600만원 소형선별기로 대체했다. 그리고 농가들이 200여명이 참여해서 바로 판매 안하고 저장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열매를 저장한 그해 가을 11월에 서울에 올라와 뉴코아, 삼풍, 현대 백화점 바이어를 만나 납품을 받아 달라고 간곡히 설득했지만 납품은 기존의 납품업체 때문에 가당치가 않았다. 생사의 기로에서 다시 만난 뉴코아 백화점 바이어가 길을 열어 주었다. 납품은 불가하고 대신 지하 식품매장 2평에 2주일간 판매행사를 하고 판매금액의 20%를 수수료로 내는 조건이었다.

우여곡절(언론방송 3사와 신문사들의 도움으로) 끝에 예상치보다 수십 배의 매출을 올리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농민들이 수입개방에 반대 대신에 스스로 자구책을 강구하고 백화점 판매행사에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고 언론 방송에서 크게 다뤄 주었다. 뉴코아에서 삼풍으로 현대로 서울에 이어 대전 대구 부산까지 찍고 다시 서울을 찍으며 성공적 판매성과를 올렸다. 그 성공을 바탕으로 한국참다래유통사업단이 탄생되었다. 이제 농업이 생산만이 아닌 생산 포장 선별 저장 유통 가공 수출까지 영역을 확대되었다. 농업이 1차산업이 아닌 6차산업의 모델이 탄생되었고 여기에 맞게 영농조합법인이 농어촌특별조치법에 의해서 개정되었다. 이후 개발한 작목이 바이오 고구마다. 흙 묻은 고구마로 구황작목 으로 경제발전에 따라서 사양길에 접어든 고구마를 다이어트 건강식품으로 탈바꿈시켰다. 일본에서 발견한 포장된 고구마에서 생각을 얻어 고구마연구에 몰두했다. 세척하면 부패하기 때문에 썩지 않게 하는 방법, 씻으면 색깔이 죽으니 살아있게 하는 방법, 저장이 잘 안되니 장기저장법 표준화 규격화 품종개발 등 8가지 과제를 가지고 3년 동안 씨름한 끝에 2001년 세척바이오 고구마가 탄생되었다. 1년 중 7-8개월 유통되던 고구마가 일 년 내내 유통되는 성과를 얻었다. 고구마 산업이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를 두고 장원석 선생은 “무술이 궁녀를 장희빈 만들었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농산물 수출대국 네덜란드의 농업을 벤치마킹했다. 네델란드 농업은 규모화 조직화 차별화 기업가 정신 4가지를 축으로 성장했다. 년간 300억 달라 흑자를 내고 있다. 네델란드 농법방식을 배워 참다래유통사업단을 선진조직으로 만들었다. 조직과 규모 등을 활성화 시켜 공장과 농장과 매장을 하나로 묶었다. 수입개방의 위기를 기회로 생산에서 2차 3차산업을 어우르는 6차산업으로 미래농업의 모델이 되었다. 한국신지식농업인 회장으로한국농업CEO연합회장으로 농업의 새로운 미래를 이끌었다.

2007년 이명박 대통령후보진영에서 실시한 안국포럼에 초대받았다. 농업토론회에서 다른 농민단체 대표와는 달리 농업을 살리자고 보조지원중심으로 하는 것은 마약주사와도 같다 농업을 산업으로 의식을 바꿔야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발상으로 수입 개방된 키위를 참다래로 키워 1000억 시장을 만들었고 구황작물 고구마를 세척바이오 고구마로 바꿔 몇 배 시장을 만들었다. 따라서 농림부를 농업식품부로 바꿔달라 그렇게 하면 농업생산 40조와 식품110조가 결합하여 150조의 규모가 된다. 고객이 농민에서 전국민으로 확대된다. 콩심은 농민은 된장 간장 고추장을 생각하며 소비자는 농업을 식품산업으로 봄으로써 농업의 부활을 할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이명박 후보의 작은 눈이 엄청 커졌다고 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결국 그는 이명박 정부의 초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되었다. 장관이 된 후 의식개혁이 첫 번째 과제였다. 농민들이 정부에 의지하고 매달리는 농업으로는 살릴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농민들 주인의식을 만들어 내는 첫 행사를 치뤘다. 취임 첫날 농민단체장 초청 간담회장에서 “주인님들이 오시는 데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장이상 20명에게 명찰을 달고 입장하는 농민단체장들에게 깍듯한 인사를 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인사를 한 국장들도, 인사를 받은 농민단체장 들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간담회장에서 이제 농업의 주인은 농업인입니다. 주인은 권한도 있지만 책임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이후부터 단체장님께서 필요한 정책을 만들어 주십시오. 농업인을 주인으로 모시는 정책의 첫 번째 행사였는데 반향은 상상외로 컸다.

15일간 말미로 127가지 정책이 나왔고 세목으로는 600여 가지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할 수 있는 것, 법령을 바꿔 할 수 있는 것, 도저히 할 수없는 것을 분류해서 농민단체장들에게 알려줌으로서 서로 소통의 장이 열렸고 서로 신뢰의 싹이 트는 장이 열리게 되었다. 농업을 산업으로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한 거북선 5대전략을 정책으로 시행시켰다. 사람을 위한 농어촌뉴타운정책, 조직을 위한 품목별 국가대표조직육성, 산업으로 시군유통회사, 규모의 경제를 위한 대규모 농업회사, 농식품 유통 고속도로 이 정책을 빠른 시간 내에 시행하기 위해서는 시행주체인 시장 군수와의 소통이 중요한 과제였다. 바로 시장군수 워크샵을 일박이일과 3번에 걸쳐서 진행하였다.

소금을 광물에서 식품으로 바꿔 우리의 천일염을 기초로 발효고 유전통식품인 김치 된장 간장 고추장 젓갈을 5대 식품으로 선정 한식세계화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취임 몇 달 후 대한민국을 흔든 무지와 허위에서 시작된 광우병 파동 에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내어놓았다. 농민단체를 주인처럼 여기고 소통하지 않았다면, 광우병 파동에 그 축산단체가 함께 일어났을 것이고,, 아마도 그 파동의 여파는 걷잡을 수 없는 더 큰 사태까지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광우병사태의 위기 속에서도 그 위기를 기회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김치 쌀까지 원산지 표시제를 법으로 만들어 식품안전과 둔갑판매 방지를 통한 유통질서 확립과 농가 소득증대에 기여한 점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농민단체가 자신을 믿어주고 광우병사태에서 시청앞 광장에 합류하지 않았던 것이나 퇴임이 결정 된 이후에도 차관 이하 전 공무원이 끝까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도 마지막 날까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고 신뢰의 바탕위에 소통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신뢰를 바탕으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큰 성과를 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