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빙바로가기
후원안내
국민성공시대는 글로벌 리더십의 선봉이 되는 단체를 지향합니다.
  • 헌혈릴레이
  • 통일안보
  • 러브라이스챌린지
  • 최고위
  • 공식
위로 아래로
국민성공시대
목록으로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7가지 삶 - 공명숙 교수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7가지 삶

한성대학교 국방과학대학원 안보전략학과 외래교수   공 명 숙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한다. 아마도 행복이란 단어를 객관적 개념으로써   선행되어져야 한다면 인간은 보통 이 행복을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각기 이해하는 측면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시키기 때문에 행복에 대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행복이라는 단어는 철학, 종교, 사회,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 따라 그 의미도 매우 다를 것으로 본다.

13년간 OECD 회원국 자살률 1위(OBS News. 2015.11.09.)를 차지하고 행복지수가 143개국 가운데 118번째(충북일보. 2015.11.09.)인 대한민국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마치 폐광 속에서 다이아몬드를 찾는 것처럼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일인듯 하다. 하지만 로마시대의 폭군 네로가 집권했을 때에도, 중세시대에 유럽에 흑사병이 번졌을 때에도 사람들은 희망과 행복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의 행복은 외면적 요소에 영향을 받지만 절대적이 아니라는 사실과 ‘누구에 의해서(by whom)’가 아닌 자신에 의해서 누구나, 언제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감옥에서, 그리고 사형장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

러시아 작가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작인 『죄와 벌』에서는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총살형이 집행되기 전에 극적으로 살아나게 되는데 그는 동생에게‘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일찍 알았다면 나의 인생이 바뀌었을 텐데......’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즉, 어떤 이의 행복은 설날이나 크리스마스처럼 특정한 사건이나 일로 경험하는 특별한 것이 아닌 살아있다는 자체가 행복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어떤 한 끼의 식사가 희귀난치성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으로 점심시간에 밥이 맛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못하고 물만 먹고 지낸 난민들에게는 신이 주신 최고의 식사가 될 것이다.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던 것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행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매일 식사를 하면서, 일을 하면서, 그리고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사회적 배경을 중심으로 행복한 삶의 7가지 기준을 메시지로 전하고자 한다.

첫째, 행복은 주관적이다.

행복은 식당의 메뉴판처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주고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 의해 얻어지는 감성적 만족결과인 만큼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환경마다, 그리고 문화와 민족마다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살 1위인 한국의 자살이유를 최빈민국 국민들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전과 민족분쟁으로 매일 죽느냐 사느냐하는 문제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그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행복해지는 것이다.

둘째, 행복은 단수가 아닌 복수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써 태생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게 되어 있다. 우스갯소리로 여자들한테 가장 큰 벌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품으로 치장해주고 무인도에서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봐주는 사람 없는 곳에서 명품, 학벌, 재산 등이 다 무슨 소용 있겠는가!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행복의 기본조건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identity)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나타내며(self-disclose) 나누는(sharing) 가운데 자신의 모습이 만족될 때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행복은 남을 행복하게 해 주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행복하게 해 주는 일이 행복한 삶일 것이다.

셋째,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 아니다.

행복하지 않다고 모두가 불행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아예 없다고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주관적이고 사람마다 인식하는 행복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정의 내릴 수 없지만 만약 이 이론이 맞는다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아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집이 불이 나서 이웃들이 불쌍하다고 위로한다. 그러나 집 주인은 속으로 웃는다. 왜냐하면 보험비가 집값의 2배가 나오는 특약보험을 들었기 때문이다. 옛말에 ‘전화위복(轉禍爲服)’이라는 말이 있다. ‘화가 변해서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을 가진 이 말을 행복이라는 것과 연계시키면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내가 겪고 있다면 곧 행복이 온다는 의미와 같다. 마치 제비를 보면 봄이 곧 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터졌다면 곧 이 불행을 덮고도 남을 행복이 온다는 것을 선조들은 이미 생활가운데 겪어서 사자성어로 후세들에게 남긴 것이다.

넷째, 행복은 인간에 따라 순간이기도 하고 영원하기도 하다.

행복의 효용시간은 대상에 따라 시간이 달라진다. 학교성적이 올랐을 경우, 복권에 당첨되었을 경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원하는 회사에 입사했을 경우, 평생 같이할 반려자를 만나 결혼하였을 경우 등등 상황에 따라 행복시간은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은 전적으로 당사자가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디시 말해 행복은 유효기간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정하면 그것이 유효기간이 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테레사 수녀와 간디 같은 위대한 성인들이 이러한 경우처럼 실천한 예이다.

행복한 순간을 기억해보면 사안에 따라 다른 시간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녀가 처음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집장만해서 이사했을 때. 자동차를 처음 구입했을 때 등등. 시간이 지나면서 행복함이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행복을 인지하고 느낄 수 있는 신이 주신 행복의 저울이 있다. 태초의 원시인들은 아마도 한 끼 식사를 하고 편하게 자면 최고의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람들의 욕구가 다양해지면서 행복은 눈에 보이고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것으로 변질되어 갔지만 그것은 진짜 행복이 아닌 소유와 본능의 만족이었던 것이다.

다섯째, 행복은 일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행복은 인간들이 주거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소유할 수도 없다. 또한 행복해지기 위해 자본이나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때 행복은 신분의 귀천여부나 성별을 따지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에 둥지를 틀 것이다. 따라서 내 자녀나 가족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하게 해줘야 한다.

실제로 런던 타임지에 선정된 가장 행복한 사람 1위와 2위는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아이와 아기의 목욕을 다 시키고 난 어머니로 뽑혔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무런 대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행동을 하고 일 자체를 즐겼다는 사실이다. 즉, 성적을 위해 공부하지 않거나 돈을 벌기위해 일하지 말고 그 자체를 즐기면 일은 노동이 아니라 행복이 된다는 것이다.
여섯째, 행복은 경쟁이 아니다.

행복한 삶은 누구나 바라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삶이다. 하지만 때론 삶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이 행복을  인간 스스로 물질의 노예가 되거나 명예욕에 빠져 출세나 성공을 위해 포기하기도 한다. 어느 누가 내일의 성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겠는가? 또한 사랑하는 가족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누가 희생하겠는가? 그렇다고 행복을 위해 내가 희생하라는 말도 아니다.

행복은 피와 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기하고 소유를 포기할 때 얻어진다.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먼저 남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 이는 물질적인 것으로 행복의 기준을 두지 말며, 또한 경쟁을 통해 남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사람들을 경쟁상대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곱째, 행복은 내 자신에게 달려 있다.

행복이라는 의미를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행복은 이미 만들어지거나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행동에서 얻어지는 것”(Happiness is not something ready made. It comes from your own actions)이라고 했다.

즉, 행복은 맥도널드처럼 주문하면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처럼 이는 오랜 수행생활을 통해 얻은 그만의 정의로 해석되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라는 말로 그의 말에 무게를 더한다. 따라서 행복은 특정 ‘상태’로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닌 ‘수고(effort)’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복한 삶은 갑자기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신의 선물이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빨 때 웃으면서 마주치는 눈길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의 욕심으로 감추어지고 잃었던 행복을 되찾기 원한다면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욕심내지 않고 산다면 누구나 행복해 질 수 있다. 왜냐하면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닌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