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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4일 조찬 내용 요약 (기록: 윤오영 강사, 강사: 장충근위원장)

29세 창업을 했습니다. 어린 나이라고 사람들이 사장으로서 인정을 하지 않아 영업이 어려웠습니다.
ROTC 12기로 1976년 6월 제대하고 취업 어려웠습니다.  연대 사학과를 졸업 했습니다.
처음 직장으로 독산동에 있던 여광물산에 취직 했었습니다.  봉제완구를 수출하는 회사 였습니다.
오너가 경기고 출신으로 경기고 출신들이 대부분인 회사 였습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영문편지 작성해서 발송하는 일이였으나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을 잘해 의대를 가려 했는데 경제적 이유로 상대를 희망 했으나
실력이 부족하여 사학과로 진학을 했습니다.
76년 1월 2일 부터 영어공부를  하루 20시간씩 공부 했습니다. 6개월 동안 열심히 학원도 다니고 공부 했습니다.
여광물산에서는 8일 마다 숙직을 했는데  
연탄가스를 4번이나 마시고 죽을 고생을 하여 퇴사 후  3개월 쉬었습니다.
다음번에 취딕을 한 회사는 흥아무역으로 제약, 화장품, 식품 관련 생산용 설비를 오파 영업하는 회사 였습니다.
입사후 첫해 80만불 매출 실적을 올리고, 다음해 100만불, 그 다음해 120만뷸 실적을 올렸습니다.
1년 만에  대리 승진, 다른 회사로 옮겨 과장 승진, 또 다시 회사를 옮겨 부장으로 승진 했습니다.
그러나 3번째 회사가 6개월 만에 망했습니다. 당시 29세의 젊은 부장이였습니다.
여직원의 권유로 점을 보러갔는데  창업도 취업도 좋다고 했습니다.
81년도  1000만원을 빌려 창업을 결심 했습니다. 담보 없이 사채하는 친구 엄마에게 빌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자가 월 4부로 1년 만에 빚이 2200만원이 되었습니다. 방법이 없으니 죽음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가깝게 지내던 친구에게 힘들어서 맨날 죽겠다는 말만 했더니 친구가 다시는 안만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잘 된다고 해도 도와 주고 어려운데 맨날 힘든다는 말만 하니 누가 도와 주겠냐?"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긍정적인 말만 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 같이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 했습니다.
85년부터 영업이 잘 되기 시작 했습니다.  16평 사무실에서 32평으로 다시 50평으로 사무실을 키워 나갔습니다.     직원을 채용하고 자동차를 새로 구입 했습니다.  회사의 규모가 키지면서
"제세"나 "대우"같은 대기업을 만들고 싶은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38세가 되는 1990년 (주)자윤포장기계를 설립 했습니다.
제조업을 하게 된 동기는 당시 독일에서 수입하여 판매하던 공압식 카톤 포장기를 20여대 판매 하였으나
에어 실린더로 작동되는 포장기계가  공기중의 수분 때문에 자꾸 정지되고  클레임이 들어와서 독일 회사에 
건의를 했으나 수용하지 않아 여러가지 문제점을 개선한 카톤포장기계 의 국산화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회사의 기술자를 독일로 보내 포장기계 제조법을 배워오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양재동에  50평  반지하를 얻어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장마비로  침수되어  기계 파손되는
큰 피해를 입어 1990년 6월 충북 음성에  140평 공장부지를 매입하고 조립식 건물에서  제조를 시작 했습니다.
오파 영업으로 번돈을 투자해서  2년만인 1992년 태평양화학 김천공장에 포장기계 2대 납품 하였습니다.
살다보니 성공하는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답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국내 1위 기업 태평양 화학에 카톤 포장기계를 공급하다 보니 화장품업계에 많이 판매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9월 포장기계 제조업을 포기 하고 공장장에게 모든 자재 및 권리를 양도 했습니다.
제조업을 포기하게 된 이유는 사람을 잘 못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저의 실수는 공장의 위치를 충북 음성이 아니라 구로동이나 기술자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서울 근교에 얻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기술을 독점한 공장장이 파업하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공장장이 회사를 안나오면 방법이 없어서 조건대로 해주고,  두 번 세 번 공장장에게 끌려다니게 되니
세 번째는 무릎을 꿇은 적도 있습니다.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눈물을 흘려가며 사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97년 8월 추석보너스 문제로 다시 공장장과 충돌을 하게 되었습니다.
포장기계 제조로 번 돈을 왜 자윤무역 직원들의 급여로 보내 주냐고  항의를 받았습니다.
결국  공장문을 닫기로 결정을 했으나 그 동안 쿠자한 자금과 기술력이 아까워 일주일을 고민한 후에
공장장을 만나 (주)자윤포장기계의 자재 및 제조권을 양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공장도 공짜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다만 당분간 독립했다는 말을 하지말고 영업권만 갖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98년 들어  IMF가 오니 영업이 안되니 공장장은 자신이 인수했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다른 회사와 OEM으로 기계를 제조하며 영업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45세에  제조업을 포기하고 무역에 전념하기로 결심 했습니다.
과감하게 털어내고 기술자와 단 둘이 새롭게 시작 했습니다. 
매달 5,000만원의 경비를  쓰다가 1,000만원으로 운영하니 흑자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남자의 전성기는 언제일까요?  
현재 93세인 김형석 교수를 만났는데 자기의 황금기는 65세 - 70세 였다고 했습니다.
저의 황금기는 45세 -55세 였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60kg 내외의 여행가방을 들고 해외를 다니고  3시간 수면을 하기도 했습니다.
35세 - 45세는 도전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할 일이 뭔가를 찾아서 전념하고 깊이로 들어가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할 일은 오파 였습니다. 그래서 제조업은 포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55세 -65세는  후계자를 양성하고 노후의 일을 구상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잘 하는 것은 무엇 일까요?  이야기 하는 것 ? 또는 토론하는 것일까요 ?
저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존경 합니다.  중1때 도산 안창호 전기를 읽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하루 1권의 책을 읽으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거의 매일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말씀 하시는 애국자란 다음과 같습니다.
* 일찍 일어나 자기집 앞마당은 물론 옆집 마당까지 쓸어주는 사람
* 길거리의 휴지를 주어 휴지통에 버리는 사람
* 내 몸이 건강하여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
애국은 쉽고 간단한 것입니다.
제가 3살때 어머님이 저를 업고 점을 보러 갔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해서 사업을 접고
어머님이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님이 운수업 하다가 망하여 홧병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사주팔자를 보시는 분이 제가 장차 장관이 될 팔자를 타고 난 아이라고 하면서 
양자로 달라는 제안을 거절 했답니다.   
어머님, 형님,  누님에게  군에 있으며 모은 돈을 모두 주었고, 
제가 결혼할 때에는 돈이 없어 계를 들어 결혼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봉사를 하기 위해 6년 전에 도산 아카데미와 비슷한 리더스 아카데미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100만원짜리 강사를 초청해 매달 포럼을 진행하느라 매달 많은 적자가 났습니다.
그래서 장소를 옮기고 저렴한 강사를 초빙하니 사람이 줄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화자와 청자의 차이가 큽니다.
1998년 4월 27일 정치에 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당시 서초을구 국회의원인 김덕룡씨가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만났습니다.  한나라당 서울 시의원으로 공천을 해줄테니 도전을 해 보라고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한봉수씨에게 양보하고 다음에 시의원을 하시라고 말씀이 있어 포기하고
한봉수씨가 공천을 받아 서울시의원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저는 한나라당 서초을구 최연소 부위원장으로 임명을 받아 봉사를 했습니다.
지금은 마음을 비우고 대한민국 리더스 아카데미 운영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